전 시 명 : Heterotopia: 김윤아기 간 : 2024년 7월 30일 부터 7월 13일 까지 / 일요일, 월요일 휴관운영시간 : 오후 1:00 부터 오후 7:00 까지장 소 : 잔느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대로 298-1)주 관 : 잔느지 원 :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 김윤아 작가의 헤테로토피아_최정은(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장)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대로 298-1, 김윤아 작가의 <헤테로토피아> 전시가 열리고 있는 잔느 갤러리 주소다. 6차선이지만 대체로 한적한 도로의 오래된 건물들에는 PC방, 배달서비스, 직업소개소, 전당포, 소금구이집, 타올가게가 보인다. 그 가게들이 연상시키는 삶의 현장과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외관부터 아주 다른 공간 ‘잔느’가 있다. 이곳에 그 입지와 일맥상통하는 ‘헤테로토피아’라는 제목의 전시가 시리즈로 열리고 있다.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는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저작과 강연 등에서 사용했지만, 다소 모호하고 일관성이 부족하며 논리 비약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아 온 용어다. 그러나 푸코가 타계한 1984년 『다른 공간들』(Of Other Spaces)이 정식 출간되면서 이 책에서 언급된 헤테로토피아 아이디어는 다양한 분야 여러 측면들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 개념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공간, 건축, 사회학, 문학, 예술 등에 나타난 현상들에 논쟁적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그 모호성 덕분에 새로운 사유와 연구를 이끌어 냈다.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의미로 등장했다. ‘유토피아’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쓴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나라 이름이다. ‘없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결합된 단어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로 현실에는 없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 즉 이상향을 가리킨다. 한편 ‘다른’이라는 의미의 ‘hetero’와 ‘topos’가 결합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다른 공간, 이질적인 장소를 뜻한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현실에서 실재하는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한다.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현실의 지도 위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장소.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그 외 현실의 다른 장소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전도시키는 장소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어린아이의 인디언 천막, 다락방, 낯선 여행지, 목요일 오후 엄마 아빠의 침대, 도서관, 박물관, 묘지, 사창가 . . . 등을 들고 있다. 그는 헤테로토피아를 유토피아 이상을 투영하는 동시에 현실에 반하고 대항하는 공간으로 설정했다. 헤테로토피아는 삶의 현장에 있는 실재하는 장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한 일상의 공간이 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일상적 삶의 세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상과의 중첩을 통해 드러나는 장소이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쾌락’과 ‘판타지’를 극대화하는 실재 공간이며, ‘위기’와 ‘일탈’의 특성을 가진 초시간적인 공간으로 언급한다. 고단한 삶의 현장을 직설적으로 연상시키는 장소들 가운데 위치한 이질적인 공간 잔느, 격자문 유리 너머 보이는 작품들, 이 거리를 지나는 이들에게 종종 그곳은 뭔가 다른 특별한 장소로서 헤테로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로 언급했던 ‘낯선 여행지’ 처럼. 어쩌면 PC방이나 타올가게와는 달리 선뜻 문 열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낯선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곳이 현실에서 어떤 명확한 기능과 목적을 갖는지 바로 알아채기 어려울테니. 무엇을 하는 곳일까, 안에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환대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속에서 낯선 여행지 잔느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그는 헤테로토피아의 첫 번째 문을 연 것이다. 잔느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것은 김윤아 작가가 연출한 두 번째 헤테로토피아 공간이다. 작가는 그리 크지 않아 아늑한 공간에 비디오 작품과 관람자 참여 작품으로 다락방과도 같은 사적 공간을 조성했다. 어린 시절 다락방. 지척에 가족들이 있지만 조금은 비밀스럽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나만의 공간, 내 일기장과 아끼는 물건들을 쓰지 않는 낡은 이불 깊숙이 보관해 두던 곳. 커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국 어머니는 모든 것을 봤지만 모른 척 해주었던 곳. 푸코가 헤테로토피아 예로 언급한 다락방은 어린아이들에게 ‘비밀’과 ‘일탈’이라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적’ 영역에 대한 유토피아적 개념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다락방은 아이가 부모로부터 분리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주어지는 사적 쾌락을 탐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잔느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설치된 비디오 작품 [남, 지연](2024)에서 흑백 영상과 함께 떨어지는 빗물 위로 아픔을 흘려보내듯 절제된, 하지만 울림이 큰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맞은편에는 관람자가 참여할 수 있는 [침묵의 이름](2024)이 설치되어 있다. 그 작품에 관람자는 붓에 물을 찍어 천위에 마음속 떠오르는 이름을 쓴다. 아니 적신다. 이름은 천에 물이 마르며 서서히 사라지고 이내 몇 분 되지 않아 천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비디오 작품 속 떨어지는 빗물이 물결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듯. 마치 무의식 저편 속 소리 없는 절규와 아우성처럼 화면 뒤에서 비치는 식물 그림자만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쓴 이름이 남지 않고 사라진다는 다행스러운 사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관람자로 하여금 그리 망설이지 않고 선뜻 이름을 쓰게 만든다. 관람자들은 이름을 쓰고 나서 마치 어떤 의식처럼 그 이름이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주 잠깐이나마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김윤아 작가가 두 개의 작품으로 연출해 낸 그 공간에서 이제 우리는 개인의 서사, 주체의 경험과 관련된 세 번째 헤테로토피아에 다가간다.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와 좋든 싫든 나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 버린, 그럼에도 끄집어 내지 않았던 말할 수 없던 이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말과 사물』(1966)에서이며 여기서 그 개념을 유토피아와 대비시켜 설명한다. 희망과 위안의 장소인 ‘유토피아’는 그것이 담고 있는 상징과 이야기들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사유 체계, 안정된 서사 구조, 그리고 그것을 규율하는 질서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토피아 개념에는 개인의 서사, 주체의 경험 등이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개입될 여지도 없다.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통일된 서사구조 내에서 체계화할 수 없는 이형, 이종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재현하는 공간이다. 재현이란 유토피아의 이상을 현실 공간에 투영해 반영하는 것이다. 즉 우리 관념 속 유토피아가 실제 삶의 공간으로 확장되어 드러나는 현장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개인과 주체의 개입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하나의 정의로 규정될 수 없고 복수의 공간들로서 개개인의 다양한 서사를 통해 등장한다. 다락방처럼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적 요소들이 주체에 의해 재현되고 이것이 다시 자기 체화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변형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개인의 서사, 주체의 경험에 의해 탄생하는 공간이다. 관람자 참여작품인 [침묵의 이름]은 관람자가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를 불러낼 수 있게 한다.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제는 자신의 일부가 된 다른 존재의 이름. 관람자들이 선뜻 그 이름을 쓰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와 경험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김윤아 작가가 구성해 놓은 자기만의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김윤아 작가는 비디오 작품 [남, 지연]에서 12년 동안 내보낼 수도 끌어 안을 수도 없던, 이제는 그 자체로 작가의 헤테로토피아가 된 친구에 관한 경험과 서사를 먼저 고백하고 표현함으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내면에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의 빗장을 풀게 한다. 천천히 흐르는 물결 위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물결 따라 흔들리는 검은 물체.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너무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비닐봉지. 하지만 우리는 비닐봉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줄곧 그것을 쫓는다. 물결에 밀려 금방이라도 떠내려갈 것 같던 그 비닐봉지는 멀어졌다가도 용케 또다시 가까이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의 헤테로토피아의 상징. “삶의 가장 바보같고 아름답던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 같은 잔느 갤러리에 들어가, 김윤아 작가의 두 작품이 환기시키는 자신만의 비밀 공간인 다락방에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문신처럼 내 일부가 되어 있는 다른 존재를 들여다 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외부에서 출발해 내면으로 향하며 서로 다른 세 가지 헤테로토피아와 만났다. 주변과 다른 이질적 공간이라는 외적 형태와 위치만으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첫 번째 헤테로토피아 잔느 갤러리, 작품에 참여하는 경험을 통해 그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두 번째 헤테로토피아,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 심연 속 화석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내가 아닌 존재 세 번째 헤테로토피아. 그것이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긍정하고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어떤 기능과 작용도 할 수 없다. 비디오 작품의 마지막 부분 “지연아, 나는 이제 너로부터 멀리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삶의 가장 바보 같고, 아름답던 한 시절을 함께 한 너와 흐르기로 했어. 이제야 너를 숨겼던 단단한 단어를 벗어 본다.” 이는 하나의 선언이다. 내게 문신처럼 박혀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나만의 헤테로토피아를 인식하고 긍정하고 선택한 사람은 그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김윤아 작가는 드로잉, 페인팅과 같은 회화로부터 영상작업, 헌 옷들을 쌓고 결박한 대형 설치작업, 그리고 헌 옷에 포슬린 슬립을 적셔 구워낸 도자 작품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매체로 실험적 작업들에 도전해 왔다. 특히 김윤아 작가 자신은 사회의 안건이 개인의 안건과 연결되는 순간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사회의 안건’은 바로 유토피아적 이상이며, ‘그것이 개인의 안건과 연결되는 순간’은 다름 아닌 헤테로토피아가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김윤아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앞으로도 변주를 지속해나갈 김윤아 작가의 헤테로토피아를 기대해본다. [남, 지연], 단채널비디오, 흑백, 사운드, 2024[Others], Single-Channel Video, B&W, Sound, 2024 [침묵의 이름], 혼합매체, 가변크기, 2024 [The Name of the Silence],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s, 2024